2020년 1월 18일 18시 56분
몸무게 3.09kg 키 50cm 머리둘레 35cm의
복덩이가 태어나던 순간.
내 평생 잊지 못할 숫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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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 10시쯤 눈을 떴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평소보다 질 분비물이 많은 것 같았다. 출산에 가까워지면서 분비물이 많아지고는 있었지만 이날은 뭔가 음? 하는 느낌이 있는 양이었다. 혹시 이게 양수인가 싶어 고민스러워 10시 40분쯤 병원에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다. 병원에서는 내원하여 양수인지 확인을 하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긴가민가 싶어서 계속 고민을 했다. 이후에 뭔가 전에는 보지 못한 색과 형태의 분비물이 눈에 띄었고 병원에 가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양수 터지면 모를 리가 없다는 말이나, 줄줄줄 흐른다는 말, 팬티를 15분마다 갈아입게 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리고 병원에 가면 또 밥을 못 먹는다고 해서 점심이라도 먹고 가기로 했고 식사 중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1시쯤이었다. 왜 아직 안 오냐고, 양수라면 24시간 내에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얼른 병원으로 오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양수였다.
내가 그려온 출산 당일의 그림이 있었다. 물론 출산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면도 있었고 구체적인 상상을 아기와 함께 얘기했을 때 아기가 실제로 그렇게 해주기도 한다는 신기한 얘기들이 마음에 와닿았던 것이다. 아기가 역아로 있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 요가를 하면서 제왕절개가 무서워, 처음으로 자연분만이 하고 싶어졌다. 병원에 일찍 가면 진행이 더디다, 진행이 더디면 촉진제를 맞을 수 있다, 촉진제를 맞게 되면 진통이 점점 점점 강도를 높이면서 파도처럼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그러면 무통주사를 맞지 않을 수 없다, 무통주사를 맞으면 아기가 약에 약간 취해서 나올 수 있고 그래서 2~3일간 젖을 잘 못 먹을 수 있다, 진행이 많이 된 이후에 병원에 가면 촉진제도 무통주사도 필요가 없으니 맞지 않는다, 집에서 남편과 감통마사지를 하며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진통을 견딜 수 있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병원에 도착하여 두 시간 만에 출산을 해냈다는 일련의 정보들로 그려온 그림이었다. 진심으로 최대한 집에서 진통을 보내고 병원에서는 무통주사 없이 최대한 빨리 낳고 싶었다. 엄마가 최대한 참고 병원에 갈 테니 병원에 가면 복덩이 두 시간 만에 만나자아, 하고 아기와 함께 출산을 계획했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이 무섭기도 했지만, 임신 출산 육아 중에 출산이 제일 쉽다는 말이나 수많은 엄마들이 해냈다는 사실에 기대어 나도 해낼 수 있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 그림의 유일한 복병은 양수가 먼저 터지는 것이었다.
1시 30분부터 촉진제를 맞기 시작했다. 양수가 먼저 터지면 돌아다니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진통만 해내야 했다. 진통이 올 때마다 호흡하며 진통을 보내고 보내고 보내며 다섯 시간이 흘렀다. 중간에 산소주입기 같은 걸 입에 대주며 호흡을 더 깊게 배로 해야 한다며 간호사들이 여럿 몰려왔다. 아가가 힘들어한다고 했다. 아가가 힘들어한다는 게 그런 표현인 줄 몰랐다. 아가가 힘들어한다는 것이 심장박동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일 수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150 이상이어야 하는 바이탈이 70까지 떨어졌던 상황이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마구 마구 호흡을 넣었다. 아가가 위험해질까봐 너무 너무 너무 무서웠고 왜 그러는지 아가가 어떤 건지 그래서 괜찮아지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오로지 그와 눈을 맞춘 것에 의지하여 계속해서 호흡했다. 그 공간에서 그만이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괜찮아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다섯 시간 동안 진통했지만 2-3cm밖에 열리지 않았고 마감 시간이 정해져 있었던 우리는 결국 제왕절개를 선택하게 되었다. 열 시간 정도 진통을 더 했으면 10cm가 다 열렸을까. 하지만 진통을 더 하다 아가한테 또 힘든 시간이 오면 그땐 어떡하지, 나는 그걸 이겨낼 수 없을 거 같아서 제왕절개를 하기로 했다. 그에게 내가 너무 빨리 포기한 건 아닐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포기? 아니 나는 빠른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하고 말했다. 다시 그 상황이 돼도 또 같은 결정을 할 것 같다고.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내가 진통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면서 이따금 눈시울이 붉어지던 사람. 수술을 하러 가는 상황에서도 하나하나 따뜻하게 설명을 전달해주고,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라고 했더니 우리가 결혼해서 잘 살고 이제 복덩이도 만나는데 다 잘 된거지 ^ㅡ^ 하고 말해주는 사람. 정말 내게 너무 과분한 사람.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가 몇 분 지나지 않아 복덩이의 응애ㅡ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눈물이 너무 났다. 뭐라 표현할 수도 없이 지금 생각해도 눈물나는 순간. 복덩아, 복덩아, 우리 무사히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건강한 너를 만났으니 우리는 다 잘 된 거야.
복덩아 안녕, 나오느라 고생했어. 엄마가 너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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